그만하면 좋은 방이죠. 무서운 방은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정말 무서울 정도로 큰 곳이구요.
맞아요. 안하면 그만이긴 한데, 안하고 있으면 어쩌겠어요?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냥 평생 갇혀있는 것밖에 안되는 반면에, 미션이라도 성공하면 다음 방에는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날지 모르잖아요. 운 좋으면 실마리 같은 거라도 얻어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구요. 그러니 아무리 위험해도 할 수밖에 없었죠.
아뇨, 왼손만 이래요. 보세요. 사람이 두 명이었으니까 하나씩 자르면 됐죠.
부러뜨렸을 때랑 똑같은 이유죠. 약지가 가장 쓸모 없잖아요.
새끼손가락은 엄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으니 보조라도 하 죠. 안중근 의사도 이 손가락을 자르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때쯤에는 저희가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한 뒤였거든요.
4년 7개월 13일이요.
그 방에 시계가 세 개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는 그냥 시계였고, 나머지 두 개는 방에 들어온 뒤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려주는 스톱워치였어요. 둘 중 하나는 새로운 방에 들어 갈 때마다 리셋됐는데, 다른 하나는 제가 나올 때까지도 계속 작동 중이었죠. 그래서 얼마나 오래 됐는지 항상 알 수 있었어요.
무슨 상관이냐면요. 저희 결혼반지가 이 손가락이거든요. 반지로 삼을 만한 게 없으니, 그냥 손에다가 평생 남을 표식을 새기기로 했죠.
단 두 사람의 세상이었으니까요. 결국 끝나버렸지만요.
혼인신고는 못 했어도 결혼이 맞다고 생각해요.
증인이 없긴요. 설마하니 그 방이 혼자서 돌아가는 물건이었겠어요? 저희를 위해 음식 만드는 사람, 그걸 승강기로 올려보내는 사람, 조건 달성하는지 감시하는 사람, 달성하면 문 열어 주는 사람, 잘 때 몰래 들어와서 피 쏟아놓은 들통 치우는 사람 , 책 가져다주는 사람까지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 사람들이 다 증인이에요.
확인한 적은 없지만,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걸 했겠어요?
음, 그건 아니죠. 다 죽여버리고 싶죠.
아, 네. 처음에는 책이 없었는데 그 후에 무서운 방 미션을 완수하면 책이 한 권씩 왔어요. 음식이랑 같이요. 처음에는 아무 책이나 오다가 나중에는 저희가 원하는 책 제목을 써서 보냈죠.
접시에 머스타드 소스랑 마요네즈로 제목을 썼어요.
당연하죠. 그런데 책 제목을 쓴 게 아니면 깡그리 무시하더라구요. 그래서 기분 나쁜 일 있을 때마다 욕 같은 거 적어서 보내기도 했어요.
아뇨, 그런 걸로 쪼잔하게 굴진 않았어요. 욕은 욕이고, 미션은 미션이니까요. 막말로 멀쩡한 사람 잡아다가 그런 곳에 가둬 두지 않았으면 그런 욕을 먹었겠어요?
정말 누가봐도 이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방에서 나갔을 때, 다음 방에서 책을 받는 식이었어요.
어우, 그럼요. 어떻게 얻은 건데 그걸 두고 가요. 나중에는 아예 도서관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쌓였는데, 절대 단 한 권도 두고 간 적이 없어요.
간단해요. 문 열리면 그 앞에 앉아서 책부터 죄다 던져넣은 다음에 마지막에 저희가 건너가는 거죠.
여러가지 방법 다 시도한 끝에 제일 나은 거 고른 거에요.
처음에는 저희가 각자 읽었던 책을 상대한테 보여주려고 주문 했어요. 책 제목을 정확히 알아야 하거든요. 근데 책들 맨 앞장 이나 뒷장에 보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 목록을 넣어놓거나, 작가 이력을 적어두잖아요. 그걸로 처음 보는 책들도 주문 했죠.
그런 적도 있어요. 응급처치학개론'이요.
알아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개론서는 대부분 제목이 거기서 거기잖아요. 얻어걸리기라도 하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다른 책이 랜덤으로 올 테니 밑져야 본전이었죠.
저희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니까, 이제... 혼자 남지 않는다는 보장이 꼭 필요했죠. 근데 그렇다고 복잡한 이론 같은 거 담긴 의학서적이 와봐야 저희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좀 실용적이고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게 필요했어요.
재미로 읽을 소설책, 만화책이랑.... 패션 잡지 같은 거요. 그리고 저는 따로 요리책도 모았고, 걔는 역사책을 좋아했어요. 시간만 때운 건 아니구요,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동시통역이랑 번역도 계속 공부했고, 이 녀석은 행정학을 공부했죠.
13,153권이요.
네, 정확히 기억해요. 그곳에 갇혀있던 시간의 거의 4분의 3을 마지막 방에서 보냈거든요.
눈치챘어요? 얼마나 걸렸을 것 같아요?
그것보다 더 길어요.
더 길어요.
더.
비슷해요.
198년 4개월 6일이요. 거의 2백년이죠.
2014년 11월 20일이요.
2014년 11월 20일이라고요.
네, 맞아요. 이해하기 어렵죠.
2014년 11월 19일에 그곳에 들어가서 198년 4개월 6일을 살고 나오니 2014년 11월 20일이었어요.
그 방에서는 늙지를 않았어요. 몇 년이 흘러도 처음 들어온 날이랑 똑같았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놓고도 함께 늙어갈 기회는 없었어요.
하하, 마치 처음에는 믿으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선생님이 제가 만난 첫번째 정신과 의사라고 생각하셨나요?
건강보험 기록이나 의료 전산망 만지작거리는 건 나 정도 되는 사람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히 날 강제입원시키려고 한 의사들도 여럿이었지만... 난 다시는 갇히지 않아요. 절대.
돈을 아주 많이 벌었죠.
그곳에 있으면서 연감이나 월간지도 여럿 봤거든요. 비트코인 , 평창 올림픽, 브렉시트,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부동산 연쇄 파산, 서울 테러, 3차 대전.. 아, 아직 3차 대전은 아닌가?
대충 잊어주세요. 아무튼, 미래를 안다는 건 대단한 이점이거든요. 경제적으로 활용하기 좋죠.
아뇨, 저 혼자 나왔어요.
둘 중 한 명만 나갈 수 있었으니까.
마지막 방 때문이었죠. 2백년이나 그곳에 갇혀있었는데, 그 중 150년을 마지막 방에서 보내야 했어요.
'살인해야 나갈 수 있는 방'이요.
저한테 꼭 나가서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했어요. 배운 것들도 써먹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달라구요.
네, 약속했죠. 그래서 전 꼭 살아야 해요. 제가 살기 위해서 목숨이 한 개 더 필요했거든요.
평생 못 잊겠죠.
아뇨. 더 이상은.
하아... 네, 힘들어요.
네, 그럼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인 거죠?
같은 시간에 올게요.
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안녕히 계세요.
이제 됐지?
이제 됐잖아. 열어줘.
이만하면 완벽하잖아. 뭘 더 해야 하는데?
얼른 열어! 이만큼 했으면 됐지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 개새끼들아! 열어! 열라고! 이 씨발!
이 씨발 개새끼들아! 어떡하라고!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이 씨발... 병원놀이를 어떻게 혼자서 하냐고.
하...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