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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나폴리탄] 테라리움 (선정적인 요소 포함)

5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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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테라리움 (선정적인 요소 포함)

2025.10.02. 03:22

1. 저 요즘 이상해요. 물만 마셔도 살이 쪄요. 저녁 식사를 제안하자 그녀가 말했다. 누군가 밝기를 아주 천천히 조정하고 있는 사진처럼, 창 밖의 거리는 조금씩 빛을 바래고 있었다. 얼음이 녹아 색이 옅어진 커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친구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소개팅 상대는, 아무래도 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요. 요새 식단 중이라고 하셨으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한숨 쉬듯 말하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지난 한시간 동안 계속 안절부절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긴장한 게 아니라 싫은 거였으면 그냥 말을 하지. 이래서 소개팅은 어렵다. 이겨야 하는지, 져야 하는지 모를 토론에 끌려가는 느낌이라서. 톡, 하고 구두로 땅을 살짝 밟으며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길게 뻗더니 내 소매를 잡았다. 진짜에요. 네?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구요. 2. 완연히 어두워진 길거리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까지 들은 것들을 확인하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뭔가를 삼키면, 그게 물이든 뭐든, 그 무게만큼 살이 찌신다고요?"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단정하게 자른 단발이 먼지털이개처럼 흔들렸다. "한번 찐 살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요?" "네. 절대로." 그녀의 옹송그린 어깨에 시선이 닿았다. 내의가 비칠만큼 얇은 재질의 흰 블라우스는, 어딘가 조금 끼듯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보통 2차 가기 싫다는 핑계를 이렇게까지 대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그녀가 눈을 꾹 감더니 손도 대지 않아 이제 보리차처럼 보이는 자신의 커피잔을 집어들었다. "..증명할게요." 그녀의 울렁이는 목울대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번에 다 삼키기 버거웠는지 이따금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지만, 결국 큰 유리컵에 담긴 밍밍한 커피를 전부 마셨다. 서로를 바라보며 민망한 침묵을 1분쯤 견뎠을까. 나는 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팔 밑이, 그녀의 턱이, 그녀의 배가. 그러니까, 그녀가. 아주 조금이지만, 실수로 오븐에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오르는 것을. 풍선처럼 고르게 팽창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열을 가한 밀가루 반죽처럼, 이곳 저곳이 터지듯 울럭이면서. 그렇게. 그쪽이 싫은 게 아니에요. 아셨죠? 아까보다 조금 더 꽉 끼게 된 블라우스를 여미며 그녀가 말했다. 3. 3년이 흘렀다. 어떤 것들은 바뀌었지만 어떤 것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내 여자친구가 되었고, 그녀의 체중은 마지막 커피를 마신 후 그대로였다.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다고 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증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 관계를 가졌던 날,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이 다시 피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어떤 것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테라리움. 밀폐된 유리병 안에 구현된 작은 생태계. 마치 테라리움처럼, 그녀의 육체는 아직 인간이 도달하지 못한 어떤 자립적 균형상태를 이룬 것처럼 보였다. 안에 식물과 자갈을 넣으면, 유리병 자체가 그에 맞게 커지는 조금 이상한 테라리움.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퍽 귀여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가끔씩 그녀가 아주 커다란 달팽이의 몸통 같다고 생각했다. 그 무엇도 먹지 않고 배설하지 않는 압도적인 무해함이, 혐오스러울 만큼 숭고하다고, 숭고할 만큼 혐오스럽다고 느껴졌던 밤들이 있었다. 안에 싸면 안돼. 살쪄.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몸에 사정했던 날 그녀가 말했다. 4. 그녀와 나의 연애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정확히 말하면, 또 평범함에도 모양새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비정상성은 집에서 데이트하는 것을 선호하는 여느 내향적인 연인들의 테두리에 맞춰 서서히 깎여나갔다. 식사를 하지 않는 연인과 갈 수 있는 곳들은 많지 않았다. 식당에서 그녀를 앞에 앉혀놓고 나 혼자 식사를 주문하면서, 이제 정말 소개시켜 줄 때도 되지 않았냐는 부모님의 책망을 애써 무시하면서. 숨으려고,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내 좁고 습기찬 원룸에 누워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기만 했다. 섹스하는 시간과 나의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우리는 주로 영화를 보거나 대화를 나눴다. 어렸을 적의 꿈에 대해, 언젠가 가보고 싶은 여행지에 대해, 요즘 부쩍 예민해진 직장 상사에 대해, 또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표현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배웠다. 어떤 저항도 없이 마음에 와닿는 단어들도 있었던 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도 있었다. 내가 죽으면 꼭 몸무게를 재 줘야 해. 그건 그녀가 생전에 가장 자주 하던 말 중 하나였다. 나는 그 말을 몹시도, 끔찍이도 싫어했다. 이따금 희멀건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대해, 죽음 후 남겨진 몸의 무게에 대해 말하는 그녀는 정말로 인간이 아닌 어떤 희귀하고 징그러운 생명체처럼 느껴졌으므로. 연애 초기의 애타는 사랑이 가시고, 그 자리에 익숙함과 권태가 들어앉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서점에 다녀왔다던 그녀는 허물 벗듯 옷을 벗어던지고서는 속옷만 입고서 소파에 앉아 떠들어댔다. “인간은 자면서 1년에 평균적으로 8마리의 거미를 먹는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죽은 다음 몸무게에서 지금 몸무게를 빼고, 그걸 거미의 몸무게로 나누면, 그게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야.” 그 때 내가 어떤 목소리로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노에 가까운 짜증이 치밀어올랐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야.” “응?” “그런 식으로 치면 날파리든 뭐든 우리가 실수로 삼키는 벌레들이 몇 마리인데. 제발 부탁인데,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닫고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대체 죽고 나서의 몸무게가 왜 궁금한건데? 너 그거 병이야. 정신병. 네 몸도 이상하지만 네 마음이 더 이상해.” 몇 초 남짓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눈에 스쳤던 것들이 이해였는지, 슬픔이었는지, 놀람이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기형적인 몸으로만 느껴낼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감정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고, 그 순간만큼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기억하건대 그녀는 이내 부드럽게 미소지었던 것 같다. 헐렁한 브래지어의 끈을 어깨 쪽으로 당겨오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렇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나는 네가 내 행복의 무게를 알았으면 해. 그녀는 땅을 구르는 비닐봉투처럼 소파에서 일어나 내 방의 유일한 창문으로 향했다. 물때가 끼어 얼룩덜룩한 원룸의 창틀에 몸을 기댄 그녀는, 어째서인지 긴 여행을 다녀온 후에라야 문득 의식하게 되는 익숙하지만 낯선 화분을 닮아 있었다. “너를 만나고 나서, 내가 죽기까지 내가 삼킨 것들의 무게는, 내가 너와 웃고, 울고, 떠들다가 삼킨 것들의 무게일 테니까. 나는 너와 함께라면 그 모든 순간들이 전부 행복할 것 같거든. 죽을 때까지.” 그녀가 등진 창 밖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을 배경삼아 미소하는 그녀의 윤곽은 왜인지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크고 흐려 보여서, 나는 그녀가 정말 식물처럼 피부로 빛을 흡수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알겠지? 그러니까 꼭 몸무게를 재 줘야 해. 5. 그녀가 죽었던 날에는 하루 종일 비가 왔다. 그 해 여름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저녁 뉴스에 3분씩 얼굴을 비추는 이름 모를 대학의 교수들은 북태평양 고기압이며 대기의 불안정성이며 온갖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결론은 어지간해서는 외출은 삼가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하필 이런 날에 청첩장을 돌리겠다고 모두를 불러모은 고등학교 동창을 책망하며 그녀는 차 키를 들고 집을 나섰다.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찬 눅눅한 지하철에 한시간여 남짓 끼어 있느니 빗길 운전이 낫다고 했다. 젖은 흙 위에 남는 발자국처럼, 비가 와야만 선명하게 남을 수 있는 흔적들이 있다. 남색 셔츠원피스에 검은 양말. 발을 구겨넣던 낡은 흰색 스니커즈의 끈에만 군데군데 남은 짙은 얼룩들. 그 신발에 발목양말은 아니지 않아, 하고 물었을 때 허리를 숙인 채로 웃던 목소리. 그 맥동하는 음성은 심전계에 표시되는 전류신호처럼 빗소리를 가파르게 이겨냈다가 잦아들었다. 먼저 자. 혹시 일찍 끝날 것 같으면 연락할게. 나 빼고 혼자 드라마 다음 편 보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집을 나섰다. 연락은 없었다. 그리고 밤 열두시가 되어서도, 새벽이 되어서도, 그녀는 집에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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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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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02. 03:23

6. 그녀를 친 타타대우 프리마의 운전사는 전날 밤부터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부산에서 서울까지 총 7시간 가까이 운전석에만 앉아 있었다고 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의식을 잃은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1차선에서 2차선으로 핸들을 꺾으며 잠에 들었을 때 고개를 완전히 꺾어 클락션에 이마를 박았다고 한다. 빠아아암- 하는 소리는 너무 뒤늦게야, 고대 그리스 비극의 불길한 예언처럼 그녀의 귀에 들려왔을 것이다. 기아 모닝의 작은 차체는 중형 화물차의 충돌을 버텨낼 만큼 튼튼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성수대교의 난간과 기아 모닝의 관계성 역시 그러했다. 계속된 호우로 인해 수색은 이틀 후에야 시작되었다. 한강수난구조대는 박살난 차체와 차 트렁크에 들었던 우산, 세차 용품 따위의 잡동사니들은 하나 둘씩 찾아냈지만, 정작 그녀만큼은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찌그러진 차체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생존 확률은 희박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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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02. 03:23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수색을 중지할 명분은 되지 못했기에 구조대원들은 계속해서 거친 물살을 헤쳤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아직까지 못 찾았다지 않아.” 결국 그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어머니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녀를 추모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적게나마 품었던 희망은 바람 부는 날의 빨래처럼 건조해 까슬해졌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녀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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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02. 03:23

7. 이제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한강은 서해로 흐른다. 너의 시신이 계속 어디론가 흘러갔다면, 아마도 서해 바다에 닿았을 것이다. 바닷가의 노을 사진을 보고 숨이 멎을 듯 좋아했던 네가, 언젠가 너와 내가 은퇴하면 가서 살자고 했던 신두리 해안의 모래언덕. 그 근처의 작은 마을에 나는 당초의 예정보다 30년 정도 빨리 집을 얻었다. 불어터진 너라도 언젠가 해안가에 쓸려온다면, 네가 나와 함께 죽고자 했던 곳에 너를 묻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는 밍크고래가 산다. 심심찮게 고래들의 사체가 부안군의, 백령도의, 또 아직 이름도 받지 못한 섬들의 해변에 떠밀려온다. 나는 그 중 하나가 어쩌면 너의 시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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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02. 03:24

2년간 바닷물과 물고기, 또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같은 것들에 헤집어진 너. 고래와의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부풀어오른 너. 새끼 밍크고래의 크기는 약 2미터 내외다. 너는 여자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으니까, 아예 비현실적인 가정만은 아니다. 어쩌면 발견되지 않은 새끼고래들의 사체들 중 하나는 정말로 너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의 오류에 봉착한다. 너는 고래가 아니다. 너의 몸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너는 테라리움이다. 안에 식물과 자갈을 넣으면, 유리병 자체가 그에 맞게 커지는 조금 이상한 테라리움. 나의 커다란 달팽이. 네가 혐오스러웠든 숭고하였든 그 이전에 너는 나의 것이었기에 나는 너와 보냈던 밤들로부터 도망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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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02. 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