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님. 윤성훈입니다.
편지를 쓰려고 며칠 전부터 빈 화면을 열어 두었습니다.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첫 문장조차 쉬이 나오질 않습니다.
어젯밤 써 놓고 다음 날 아침이면 구겨 버리는 연애편지마냥,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네요.
'힘내라, 잘 될거다!' 말로만 쉽게 내뱉기엔, 제자님이 견디고 있을 불안과 답답함을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만 같아 그랬나봅니다.
편지를 읽고 있을 사정과 마음이 모두 각각일진데,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다 이해하고 있는 양 가식적인 위로 따위나 하는 글이 될까 망설였답니다.
열아홉, 스무 살.
곧 어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맘 푸른 소년이고 새순 같은 소녀일 뿐인데, 세상은 느닷없이 제자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하라 합니다.
나는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 사람인지 조차 알아낼 시간이 없었는데...... 벌써 능력을 증명하고 방향을 정하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을 살 것이라는 겁박처럼...... 그 한가운데에 수능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기대와 불안이 단 한번 시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려들다보니,수능이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의 판정처럼 느껴집니다.
이 시험만 잘 보면 지난 시간이 모두 옳았던 것이 되고, 잘못 보면 지난 노력과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모두 부정 당할 것 같은 두려움도 밀려옵니다.
뜬금없이 예민한 화가 올라오고, 몸은 무겁고 마음은 우울해지고, 가족과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모진 원망과 결례를 범하고는 이내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자님. 수능 문제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곧 인생의 정답을 당장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자님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삶의 궁극적인 숙제들은 오히려 입시가 끝난 뒤 더 크고 복잡한 모습으로 찾아올 것입니다.
세상은 때때로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은 채 낯선 문제를 내어놓지요. 돈과 사람과 양심이 뒤섞인 문제, 직업적 성패,
자녀의 성장과 나의 늙어감의 교차, 언젠가 오고야 말 부모님과의 이별......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좌절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비극이 찾아올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 묻고 찾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때마다 완벽한 답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두려워도 한발 내딛고, 틀렸다면 고쳐 보고,
부족하다면 다시 배우면서 삶에 주어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정립해 가는거죠.
입시는 그 수많은 질문과 도전 가운데 제자님이 마주한 첫번째 시험대이고, 시시각각 닥쳐올 막막한 난제 앞에서도
끈질기고 성실하게 응전하는 태도와 방식을 연습하는 일입니다. 연습일 뿐이므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한번의 연습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의 의미는 단지 몇 점을 더 얻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미루고, 뜻대로 되지 않는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 가며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일. 어제의 부족함을 핑계로 오늘까지 포기하지는 않는 일.
그 과정에서 제자님은 문제집에 적힌 지식만이 아니라 자신을 이끌고 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입시가 제자님에게 남길 가장 귀하고 값진 경험일지도 모릅니다.
제자님. 맘 먹은대로 풀리지 않는 모의고사 문제 몇 개, 미처 계획만큼 못채운 공부시간, 늦어버린 오늘 아침 늦은 기상시간...
혹시라도 이런 것 하나하나 마다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운가요? 남들만큼 똑똑하지 못하고 불성실한 내 자신이 밉나요?
아닙니다. 제자님 그러지 마세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아요.
불안한 자신을 나무라기 전에 그 불안을 안고도 오늘을 견디고 있는 자신을 먼저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잘 해내고 있어요. 제자님은 충분히 잘 해내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세운 계획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사람도 없으며, 주어진 모든 시간을 성실하게만 살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더 자고 싶고, 더 쉬고 싶고, 더 놀고 싶은 그 많은 순간을 누가 다 이겨낸답니까……
돌이켜 보면 아쉬운 날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지난 시간을 큰 탈 없이, 제법 착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완벽함을 전제로,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앉아 책을 펴고, 태블릿을 열고,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을 이겨 내며 안간힘을 쓰고 있잖아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견디며, 해야 할 일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미 이기고 있는 것이죠.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제자님이 느끼는 이 후회와 불안이야말로 자연스러운 성장의 과정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흔들리는 그 마음은 미숙함의 증거만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성장의 징후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지기 위한 부단하고 끈질긴 동력이 제자님의 마음속에서 살아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날은 허비한 것 같아 후회하고, 남은 날은 못해낼 것 같아 비관하고...... 우리 그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요?
지나가 버린 시간은 다시 살아낼 수도 없으므로 진 것을 이긴 것으로 바꿀 수 없더라도, 아직 오지 않은 날은 져본 적이 없으므로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가야합니다.
그저 그래서…… 오늘 하루 딴맘 먹을 것 없이 후회 남지 않도록 최선만 다해 보는 겁니다. 거창한 결심까지는 필요하지 않아요.
오늘 들어야 할 강의를 듣고, 오늘 풀어야 할 문제를 풀고, 틀린 것을 다시 확인하고, 피곤하면 잘 쉬고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는 것.
그렇게 오늘을 제법 괜찮게 살아 내는 날들이 모이면 어느 순간 제자님은 시험장 앞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수능 시험장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해 주세요.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도망치지 않았다고. 불안했지만 여기까지 왔다고.
잘 해내고 있고 끝까지 그렇게 해낼 것이라고.
사랑하는 나의 제자님. 윤사탕이들...
올 한해 저의 수능 사회문화 라스트 댄스를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 해주고 있는 제자님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은퇴를 하겠다는 생각을 접고, 차기 통합사회 수능 강의까지 힘을 다해보자고 결심하게 된 것도 제자님들의 응원과 애정 덕분입니다.
제자님들이 입시에서의 저의 쓸모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여겨주신 덕분에 더욱 용기를 얻고 다음 또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수강평과 디엠을 통해 보내준 마음을 만날 때마다 저와 함께 공부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말,
힘든 수험 생활 중 제 강의가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는 말, 선생님 덕분에 다시 공부할 힘을 얻었다는 말.
저는 그 글의 어느 한 구절도 마음에 남기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읽고 또 읽고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힘이 다하는 날까지 여러분의 동생과 후배들에게도 다가올 수능에서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잘 될 겁니다.
제자님. 우리가 이깁니다. 끝까지 제자님의 승리를 위해 온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많이많이 사랑합니다.
2026년 10월. 윤성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