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보이는 건 하얀 방이였다.
"뭐... 뭐야 여긴...?"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온통 새하얀 정사각형의 방, 시선 정면에는 두 개의 문이 보인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문
내가 누군가한테 원한 살 짓이라도 했던가?
아니면 누가 나를 납치하기라도 한 걸까?
혹시 장기 밀매?
수많은 물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는 싶지만, 문 너머 뭐가 있을지 모르기에 입을 닫았다.
몸을 뒤져보지만 휴대폰이나 외부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 보려 할 때
갑자기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꽤 신중한데, 소리부터 지르거나 날뛰지 않고>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 방안에는 나 혼자뿐이다.
천장을 살펴봐도 스피커 같은 건 없다.
<아, 놀랄 것 없어. 나도 너랑 같아, 이곳에 갇혀있어>
<너처럼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이란 소리야>
어디를 둘러봐도 소리가 나오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소리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림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된다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가 그래>
<적어도 너랑 나는 시각과 사고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감각으로 이어져있어>
<한마디로 네가 말하고 듣고 피부로 느끼는 건 나 또한 느낄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 네 생각까지 읽지는 못하니까 안심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할 말 있으면 소리 내서 말해, 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리면 알 수 없다고>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오게 된 건데?!"
<그건 나도 몰라, 나도 너처럼 억울하게 이곳에 왔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한 거야?"
<나는 너보다 더 일찍 깨어났으니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었지>
"누가 이랬는지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어... 나도 딱히 짐작 가는 사람은 없어, 그보다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해>
"탈출?"
그 순간, 벽에 걸린 문 두 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일단 내 역할은 길잡이야, 네 역할은 탈출자고>
"잠깐, 잠깐, 길잡이? 탈출자?"
<응, 나는 너랑 달리 사방이 다 막힌 방 안에 있거든>
<너를 탈출 시켜야 나도 밖으로 나갈 수 있어>
"..."
<내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서 네가 탈출하면 우린 돌아갈 수 있어>
<참 악질적인 게임이지?>
"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뭐, 정 싫으면 네 마음대로 하면 돼, 너도 나도 함께 망하는 거지>
<하지만 네 말대로 내가 너를 해치려는 인간이면 굳이 이런 일할 필요까진 없지 않겠어?>
<그냥 너를 납치해온 순간 뭘 해도 했을 거야>
<판단은 너에게 맡길게>
맞는 말이긴 하다. 뭐가 됐든 녀석이 이 일을 꾸몄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놈이 나를 갖고 놀려고 일부러 이러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네 앞에는 파란색과 초록색 문이 있지? 정답은 파란색이야>
문으로 내 시선이 향한다.
...녀석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뭐, 이해한다. 말로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네가 나를 못 믿겠다면 증거를 조금 보여줄게>
그러자 갑자기 몸에 몸에 간지러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
그 뒤에는 꼬집거나, 바닥을 뒹구는 듯한 감촉
"야... 야...! 잠깐...!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이거 기분 나쁘니까 그만해...!"
놈의 말대로 감각이 공유되듯 내 몸에는 갑작스럽게 여러 감각들이 들이닥친다.
하긴, 애초에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이다.
나는 자연스레 이 상황을 납득하고야 말았다.
<어때, 이제는 믿을 맘이 조금은 생겼어?>
<어떤 악질적인 놈이 여기에 우리를 가둬뒀건, 초자연적인 무언가에 휘말렸건...>
<지금은 일단 이곳을 탈출하는 거에 중점을 둬야 하지 않겠어?>
"후우..."
한숨을 길게 쉰 나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렸단 것을 깨달았다.
"네가 해석한 암호, 정확한 거 맞지?"
<물론이야, 적어도 암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해석 가능하더라고>
<그리고 네가 잘못되면 나도 잘못돼, 그러니까 나도 필사적으로 노력할 거야>
"좋아, 믿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문고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문이 열리자 하얀 방과 마찬가지로 일자형의 새하얀 복도가 보였다.
"엄청 긴 통로가 나왔는데?"
<응, 그럼 계속 걸어가도록 해>
놈의 말을 따라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아! 혹시라도 네 눈에 뭐가 보이거나 혹은 문이 아니더라도 갈림길이 나오면 꼭 나한테 말해줘>
<네가 뭔가 꺼림칙하거나 한 게 있으면 다 소리 내서 말해달란 말이야>
<적어도 그러한 것에 대한 대처법들도 내가 가지고 있거든>
"그래, 알겠어. 알겠다고..."
<조급해 할 건 없어, 내가 너보다 하루 먼저 왔는데 이 공간은 특별해>
<배가 고프거나, 지치거나, 딱히 그런 것들의 제약을 받지는 않아>
<중요한 건 신중하게 앞으로 발을 내딛는 거야>
<열심히 해서 둘이 함께 꼭 빠져나가자>
"응, 그래, 꼭 탈출하자"
"야, 계속 걷고 있는데 벽에서 문이 보이는데? 문은 두개야"
<그러면 문의 색깔을 확인해 봐>
"둘 다 흰색이야"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소리를 들어봐, 열리지 않게 조심하고>
"이렇게?"
<방금 파도 소리가 들린 방 있지? 그 방 문을 열어>
문을 열자 폭포수와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왓! 야?!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그 물은 곧 네가 지나온 통로로 다 빠져나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
녀석의 말대로 물은 10분 정도 쏟아내리다 다 빠져나간다.
"내가 지나온 길에 배수구는 없을 텐데..."
<궁금증은 좋지 않아, 그게 어디로 사라젔는지 알아내면 별로 유쾌한 경험은 못할 거야>
<계속 걷도록 해>
"야, 네가 보고 있는 종이에 대해 나한테도 좀 알려줄 순 없어?"
"말만 따라 들으려니 답답하다고"
<미안해, 이건 이 공간이 정한 규칙 같은 거거든>
<내가 구체적인 걸 너한테 알려주는 순간 둘 다 게임오버야>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이쯤 오니까 나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느 정돈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래도 심심하지 않게 계속 말동무는 해줄게>
<단, 나랑 이야기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못 쓰는 상황은 없길 바란다.>
"물론이지, 그 정도 멍청이는 아니니까"
생각보다 긴장감이 많이 풀렸다.
이야기 나눌 사람도 있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나한테 위해가 될만한 건 보이질 않았으니까
물론 무엇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마음은 있었지만
어느덧, 퍼즐 게임을 푸는듯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구름과 달이 있어, 분명히 문을 열고 나왔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마, 그 구름은 밟고 건널 수 있어>
"정말 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돼?"
<어, 하지만 네가 방금 귀를 대고 들은 괴물 소리는 안에서도 들려올 거야>
<그런 경우 귀를 막고 30초 정도 엎드려서 숨을 참아>
<그러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어>
"이번엔 네 갈림길이야"
<걱정할 것 없어, 정답지는 항상 있으니까>
<해와 달이 그려진 곳으로 향하도록 해>
"한쪽은 영혼처럼 반투명한 다리가 있고, 한쪽은 돌로 된 다리가 있어"
"가운데는 녹색 나무가 있고"
<그 경우에는 반투명한... 잠깐...?>
"...?"
<아니, 아니, 잠깐 멈춰봐>
<돌로 된 다리 쪽... 아니 이건 검을 찬 기사가 있는 조각상이었던가...?>
<분명 알고 있었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어?"
처음으로 녀석이 머뭇거렸다.
<아냐, 아냐, 내가 답을 잘못 구한 거 같아>
<생각할 시간을 좀 줄래? 문제가 좀 어렵네...>
"어... 그래"
뭐... 하다 보면 막힐 수도 있지
유달리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아, 아아, 아아아아-! 으아아아아---!!>
녀석이 갑작스레 탄식과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하... 아핫.. 아하하하... 하핫..! 하하하하....!>
이윽고 탄식은 웃음으로 바뀌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한다.
"뭐야, 왜 그러는데?"
"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이거였구나... 이거였어...>
<아... 아하하... 이제야 이해가 다 가네...>
<그랬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아하하하하하...!!>
"뭐라는 거야?! 알아들을 수 있게 좀 말해봐!"
연신 혼잣말을 내뱉다가 웃어대기를 반복하는 녀석에게 큰 소리를 친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지?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함이 옥죄여온다.
녀석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 너는 운이 좋아. 선택할 수 있을 거거든>
<하지만 그렇기에 운이 나빠, 네 선택은 항상 정답이 아닐 거거든>
"?"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이 녀석 뭐지?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아니, 대체 무슨 상황인지 말이라도 해보라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진실이야>
"뭐?"
<사실 너한테 했던 말 거의 다 거짓말이었어>
"야...?"
<어, 나도 너랑 똑같아, 이 방에 갇힌 사람, 그건 맞아>
<근데 나는 길잡이가 아냐, 너랑 똑같은 탈출자지>
<내가 있는 이곳은 미궁이야, 너랑 완전히 똑같은 미궁>
<서로 완전히 똑같은 미궁 안에 두 명의 사람이 있어>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지만 통각을 공유하고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있어>
<그래, 이제 이해가가?>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여태 알려준 건 뭔데...?"
"여태껏 네가 알려준 것들은 다 뭐였냐고!"
<그야 멍청이들을 속여서 알아낸 길이지>
<너처럼, 내가 안내자 역할이란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나를 따랐던 놈들>
<그 멍청한 놈들을 먼저 보내서 어느 길이 정답인지 알아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그걸 반복해서 알아낸>
<수백수천 명을 속여서 얻어낸 정답지였지>
<너도 내가 길을 알아내는 장기짝 중 하나였고>
<네가 앞으로 살아나간다 해도 모든 길을 다 기억하진 못할 거야>
<어차피 너도 나랑 같은 것을 깨달을 테니, 차라리 죽는 걸 추천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