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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나폴리탄] 꿈의 수호자 (6)

5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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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꿈의 수호자 (6)

2025.10.10. 07:00

세 시간 뒤, 우린 함께 연구실 바닥에 앉아 새로 얻은 영상을 재생했다. 이번에 그가 꿈은 영상 표기 상 1초가 실제 분량 204시간에 해당했다. 그 다음 꿈은 1초가 67.4시간이었고, 그 다음은 132.25시 간이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꿈과 현실에서 시간은 다르게 흘렸다. 1초가 수십 혹은 수백 시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속도차였다. "아바르하신 박사가 맞았어요. 꿈은 시냅스가 불필요한 기억을 제거하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기 억 제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더 복잡한 작업이에요. 몇 시간만에 수십 년어치의 기억이 죄다 뇌에 쌓 인다고 생각해봐요. 세상에, 그걸 어느 뉴런이 견디겠어요. 우리가 꿈을 일부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건 뇌의 자기보존전략이었던 거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설명을 가만히 들었다. "이제보니 꿈에서 지극히 논리적이고 당연했던 일들이 깨어나서 보면 말이 안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수십 년분의 기억 중에서 아주 작은 조각들만 따로 빼다가 꿰어맞췄는데 그게 제대로 된 그림처럼 보이겠어요?" 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희열을 느꼈다. 옅은 웃음을 띈 남자를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이 모든 진리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다가 나 또한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에 한 대 얻어맞았다. 그와 나의 공유동. 그건 몇 시간의 짧은 낮잠이 아니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뿐 우린 수백 년간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남자에게 뜬금없이 느끼기 시작했던 감정의 정체를 설명했다. "이해돼요? 내가 방금 한 말들." "응. 전부 다." "...우리가 같이 꿈 꾼 거 기억해요?" "어떻게 잊어, 그걸." "그게 전부..." "그냥 이렇게 말하자." 남자의 손이 내 허리에 감겼다. "너랑 내가, 사실 기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사이라고." 다음 순간, 그는 잠들 때마다 하는 것처럼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내 팔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의 허리에 감겼다. "정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가 겪은 게...다... 다..." "의미가 있었냐고? 당연하지."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의 다 잊어버렸잖아요. 수십 년 중에 고작 몇 순간만 기억했다구요." "기억할 수 없어도 일어났던 일이야." "그 반대에요. 기억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거나 마찬가지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우릴 묶어주는 추억이 없다면 뭘 가지고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잘 봐. 네가 초콜릿을 싫어하다가 어떤 사건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어. 그 사건이 뭐였는지 잊어버려도 넌 앞으로 쭉 초콜릿을 좋아하겠지. 그럼 네가 잊어버린 그 사건은 삶에 어떤 의미도 없는 걸까?" "잃은 걸 보지 말고 얻은 걸 보라는 거네요." "영혼이란 기억의 총합보다 큰 법이야. 네가 나한테 처음 키스하기로 결심한 순간이 언젠지는 잊어버렸지만, 앞으로 몇 번이라도 나한테 입을 맞출 거란 사실이 더 중요한 것처럼..." 아, 바보 같은 인간. 굳이 그렇게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난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감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안 그래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와중에 공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 말만 골라서 하는 못된 입술을 내 입으로 막았다. 행복했다. 나는 친구도, 스승도, 모두 잃은 대가로 나와 영원을 함께해준 동반자를 얻었다. 키스는 길게 이어졌다. 우린 숨이 모자랄 지경이 되어서야 서로의 입술을 놔주었다. 한동안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서로의 눈만 바라보던 끝에 그가 먼저 침묵을 깼다. "여기까지 했으니까 이제 그만 둘 수 있지?" "그만두다뇨?" "이 연구 말이야. 충분히 알아냈잖아." “‘충분히' 알아낸다는 건 불가능해요.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거든요." "장난하는 거 아니야. 이 정도 했으면 너도 할만큼 했어." "할만큼 했는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할 거에요." "그럼 지금 결정해.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 힘든 일 많이 겪었잖아. 나랑 같이 가자." "걱정돼요? 나 죽이러 오는 놈들 있을까봐?" "......” 어느새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까봐 당신이 여기 있는 거잖아요. 당신이 막아주면 돼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잠깐동안은 그 자신감 없는 푸념마저도 사랑스러웠다. 그가 꿈의 수호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는 꿈의 수호자를 실제 존재하는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야 했다. 우스꽝스러운 도시전설로나 생각해야 했다. 난 그의 품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다른 할 일이 떠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구실을 나가려했지만, 그가 먼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본인의 실수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제기랄. 참 많은 걸 알게 되네.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요. 너무 평화롭더라니.” "....." "나도 자살하나요? 우리 교수님처럼?" "아니." "그럼?" "......“ "그럼 어떻게 날 막을 건데요?" "네가 사실을 알고 난 뒤에 무서워진 나머지 스스로 기계를 부쉈다고 보고할 거야."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 돼." 남자의 얼굴은 명령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내게 빌고 있었다. "전부 그만둘 거지? 알만큼 알았잖아." 아. 왜 내가 행복할 거라 생각했을까. "처음부터 전부 다 알고 있었어요?" "아니." "어디까지 알았는데요?" "그냥 널 죽여야 한다는 거. 꿈에는 인류가 알아선 안되는 위험한 비밀이 있다는 거." 인류가 알아선 안되는 위험한 비밀이라니. 애들 보는 영화도 아니고. 꿈의 수호자들이 현장 암살자들에게 내리는 지령에는 퍽 낭만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대체 뭐가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이라는 건데요? 우리가 함께 알아낸 것들 중에 뭐가 그렇게 위험하죠?" "......" "말해봐요. 그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는데요?" "나도 몰라. 하지만... 생각해봐. 꿈 속에서 우리가 또 꿈을 꾼다는 부분 말이야." 면밀하게 꿈 렌즈 속 영상을 살펴본 결과, 영상 속 시점의 주인이 침대에 누우면 아무리 배속을 느리게 해도 다시 타닥거리는 하얀 화면이 나오는 구간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꿈 속의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 그 안에서 또 꿈을 꾼다는 것. "너희 교수가 그랬댔지. 정신은 아름다운 프랙탈이라서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그게 어때서요?" "너와 네 부류들이 발견하는 비밀이 우리 사회를 멸망으로 볼고 갈 수도 있다고 했어. 어떤 방식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제 알 것 같아." 한 발 늦었지만, 나도 이제 꿈의 수호자들이 뭘 두려워하는 것인지 감이 왔다. "멈출 거지?" "난 약속한 게 있어요.“ "제발. 넌 그 사람들한테 이제 빚 진 거 없어." "사람들에게 알려야 의미가 있어요." 내 손목을 쥔 남자의 손은 점점 더 세게 옥죄어왔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알린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약속이니 뭐니, 다 네가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럼 날 죽이지 마요. 나한테 그만두라고 하지 말고, 당신이 그만둬요. 그럴 순 없어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답은 이미 알 수 있었다. 하긴. 그 많은 학자들을 죄다 죽여버린 놈들이 진행 중인 임무 따위 그만두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곱게 놔주는 것도 이상하다. "하, 멍청한 질문 같은 건 학부생들만 할 줄 알았는데." 유일한 위안이라면 실없는 탄식에 그가 피식 웃었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죽이지 그랬어요?" "그때는... 네가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않는지 확인해야 했어." "접촉하면? 누군지 알아내서 그 사람들도 다 죽여버리게요?" "……” "예정된 기한이라도 있어요? 나 죽여야 하는 기한." "다음 주말. 하지만 지금이라도 네가 멈추면.." 난 그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얹었다. "날 죽여도 끝이 아니라는 건 알죠?" "......" 의미 없는 말이 사라지자 난 그대로 그 남자다운 보기 좋은 턱을 쥐어 내 입술로 이끌었다. 다음 주말까지. 우리에게 남은 기한이었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키스가 끝났을 때 내 손에는 공유몽 중계기가 들려있었다. "먼저 영원히 함께 행복하자구요. 다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그리하여 내가 거실의 러그에 누웠을 때, 옆에 나란히 누운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끝으로 타닥거리는 소음이 돌아왔다. 화면은 다시 하얀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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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23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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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10. 07:03

https://www.postype.com/@sagebornsmiscellany/post/16257895 어엄청난 분량이긴 하네요🫠 개인적으로 서사 하나로는 약간 오글거린다 싶을 순 있어도 레전드라고 생각되긴 하는데.. 마지막 나폴리탄적인 요소도 그렇구요. 일단 작가분 필력 자체가 너무 어마무시해서 체급으로 압도당하긴 하네요 곧 저녁먹고 외출시간이에요 다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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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작성자)

25.10.10. 07:07

약간의 오타는 포스타입 글을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에서 텍스트 스캔이 잘못 된거라…검수가 미흡했네요 죄송..! 원작자분 포타에서 공유 허용이라고 적혀있어용 다들 원작자분 포타가서 더 많은 개ㅐㅐ명작들을 보시길 바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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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

25.10.10. 07:36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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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3

25.10.10. 08:49

처음부터 남자가 꿈의수호자였던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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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4

25.10.10. 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