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을 거야, 난 살 거라고, 살아서 여기서 나갈 거야."
<그래, 네 선택을 존중할게>
<어차피 둘 중 누군가 죽지 않으면 새로운 인간은 들어오지 않아,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네가 싫은 것 같으니 내가 양보하도록 할게>
<나는 황금 사자 동상이 있는 세 갈래 길에서 가운데로 갈 거야>
<지금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겠지만 언젠가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 거야>
발소리가 들린다. 녀석이 걸어가는 발소리가...
곧이어 섬뜩한 감각이 몸에 들이닥쳤다.
마치 예리한 칼로 피부를 긁듯이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놈이 내지르는 단말마와 같은 비명이
그 뒤에 몰려드는 극심한 통증이
"아아아악...!!---- ----"
고통은 녀석의 비명 소리와 비례하지 않았다.
놈의 비명은 금세 그쳤지만 나의 비명은 계속되었다.
온몸이 무언가에 서걱서걱 씹히는 감각
살이 찢어지고 뜨거운 것이 몸을 불사르는 감각
배를 창으로 꿰뚫듯 찢어지게 아프며 위장부터 시작해서 모든 장기가 뒤틀리고 꼬여버리는 감각
거의 한 시간 동안 녀석의 육신이 겪는 구체적인 감각이 온몸을 강타한다.
"헉... 허억... 헉..."
--
고통은 나에게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을 안겨주었다.
죽고 싶지 않다. 반드시 살아 나갈 거다.
한참 동안 혼란스러운 머리를 움켜쥐고 있다가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저기 누구 없어요...?>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다행히도 먼저 번 그 녀석이 스스로 무너져내린 탓에 내게 기회가 왔다.
놈이... 어떻게 했더라? 그래, 길잡이
나는 녀석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며 똑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음... 저기 정신이 들어?"
<당신은 누구죠...? 지금 어디에 계신 거죠?>
<저를 왜 여기에 데려온 건가요?>
"아아, 잠시만... 진정해 봐요. 저도 그쪽이랑 입장이 같아요."
놈이 했던 것처럼 나도 할 수 있다.
내가 걸어왔던 발자취를 더듬으며
녀석을 따라서 친절한 길잡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때론 위기도 있었고, 이상한 놈들도 만났지만
놈들을 구슬리고 희생시켜가며 나는 한 발씩 전진했다.
비록 온몸을 지져놓는 뜨거운 작열통을
송곳 같은 예리한 것이 몸을 씹는듯한 섬뜩한 통증을
발끝부터 몸이 썩어문드러지는 끔찍한 감각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의 형태를 수천 번은 겪어내었지만
나는 무너 질 수 없었다.
여태 버텨온게 있다.
수백 번을 버텼으니, 이다음이 출구일지도 모른다.
수천 번을 버텼으니, 이제 곧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 실낱같은 희망과, 내가 겪어온 과정들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죽기 전 절규에 가득 찬 단말마를
나를 원망하는 저주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외침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수백 번씩 들었다.
그러한 말들 따위는 이제 감흥도 없이 흘려들을 수 있건만
이놈의 고통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익숙해지지도 적응할 수도 없었다.
포기할 수 없다.
놈이 지나왔다던 황금 사자 조각상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이제 곧 끝일 거다. 이제...
그러나 나의 기대와 달리 또 갈림길이 나왔다.
황금 칼과 방패 문양이 그려진 네 갈래의 갈림길에서 나는 멈췄다.
네 갈래라... 최소 세명은 여기까지 데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정신을 차리고 난리 브루스를 치고 있는 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야 씨발...! 어떤 놈이 날 가둔 거야?! 당장 뛰어나와!>
하는 행동을 보니 꽤나 입이 험하고 다혈질적인 놈이 들어온 거 같다.
뭐... 익숙하다. 이런 놈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구슬리는 것 따윈 일도 아니다.
"저기, 잠시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줄래?"
.
.
.
.
.
<지금 있는 곳은, 흠... 커다란 나무 두 개가 있고 >
<세 개의 갈림길이 있어, 길은 각각 흙길, 아스팔트, 자갈길이고>
"음, 그래 거기선 말이지, 거기선 흙..."
<흙길?>
"아니 잠시만, 생각해 보니..."
잠깐, 전에 흙으로 갔다가 죽는 길이 있지 않았나?
여기가 아니었나? 아, 그건 붉은 나무가 있던 길이였나?
뭐였지...? 잠깐...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지나온 곳이다.
다른 녀석들을 수백 번도 더 안내했을 길이다.
이곳에서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이 나야만 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좀 어려운 문제가 나왔어,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을 되새겨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안내했던 길들을 하나씩 점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까먹었다. 길들 중 몇 개를 까먹었다.
어제 느꼈던 통증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이곳에 지나치게 오래 있어서 내 머리가 이상해져서 였을까
아니, 어쩌면 내 뇌가 인간의 한계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대체 얼마나 더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거지?
앞으로 길이 더 늘어난다면, 더 기억할게 많아질수록
나는 더 많은 것을 까먹을 것이다.
이 문 앞에 출구가 있을지, 또 이어진 미궁이 있을지 나는 모른다.
여태껏, 해온 게 아까워서, 이 앞만 가면 출구가 있을 거라 믿고 버텨온 횟수만 수백 번이다.
그 실낱 같은 바람으로 여기까지 버텨왔건만
반드시 탈출하겠다던 각오는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죽음의 고통을 수천 번 더 체험하면 되나?
수만? 수십만? 어쩌면 그 이상?
대체 왜 그렇게 해서까지 탈출하려 했지?
나는 뭘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힘들게 발버둥 치는 거지?
살려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나가야 할 필요가 있나?
어차피 사람의 삶은 늦든 빠르든 죽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가서 잠깐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해도 나는 다시 죽어야만 하는 거 아닌가?
모든 것에는 끝이 있지 않은가?
남들도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여기서 맞이한다 생각하면 그리 억울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왜 그 끝을 받아들이지 못해 고통뿐인 삶을 연명하는가?
차라리 내가 함정으로 인도해서 죽게 만들었던 녀석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온 모든 과정이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모든 삶은 죽어서 무로 돌아간다.
내 노력과 무관하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나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아둥바둥거리며 고통 속에 있었구나
나는 지옥에 있었고 다른 놈들은 지옥을 벗어났구나
처음 그 녀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녀석...
내가 처음 만난 그 녀석...
나는 마침내 녀석을 떠올렸다.
내가 이곳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인간
내게 선택할 기회를 줬던 그 녀석이
머릿속에 천둥이 치기 시작한다.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흘려버렸던 놈의 말들이 뇌리를 강타한다.
"아-- 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 네가 이랬구나.
아, 네가 했던 말이 이거였구나
네가 느꼈던 게 이거였구나
이 감정을, 이 상황을, 너도 느꼈구나, 너도 겪었구나
그때 그 탄식과 비명, 웃음소리를 이제야 이해하리라
이제서야 모든 걸 알겠다.
녀석이 했던 말도, 녀석이 했던 행동들도
너도 똑같은 걸 깨달았구나
너도 똑같은 걸 생각했구나
다른 녀석들을 장기짝처럼 이용했던 나야말로 멍청했구나
속아 움직이던 그 바보들이 차라리 더 좋은 결말을 맞이했구나
네가 나에게 그랬듯, 너도 누군가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구나
네가 나한테 그랬듯, 나도 지금 저 녀석에게 똑같이 말할 거구나
너 이전에도 몇 명이고 너와 같은 녀석들이 있었을 거고
나 이후에도 몇 명이고 나와 같은 녀석들이 있을 거구나
<뭐 하는 거야, 이 새끼야! 왜 갑자기 지랄하는 거야?!>
아, 나는 이제야 너를 완전히 이해한다.
그 순간, 실소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핫... 아하핫... 으하하하하핫....!"
녀석과 같은 웃음을, 녀석과 같은 말을 나는 입 밖으로 내기 시작한다.
온몸을 찢어발기던 고통 속에서도 꽉 붙들어잡던 이성의 끈을 망설임 없이 놓아버렸다.
<야 이 새끼야,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왜 쳐 웃는 건데!>
방금의 깨달음으로, 장기짝에서 자유를 얻고 인간으로 승격한 녀석에게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를 얻은 한 명의 사람에게
내 말을 일절 듣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려고 발버둥 칠 하나의 생명체에게
그렇기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저 녀석에게
"아... 너는 운이 좋아, 선택할 수 있어"
"하지만 그렇기에 운이 나빠, 네 선택은 항상 정답이 아닐 거거든"
"오직 너에게만 사실대로 다 말해줄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이야"